“대체 언제 끝나? 일은 왜 맨날 이렇게 많아~ 이러다 해가 지고 나서야 데이트를 하겠어.”
오랜만에 단장 집무실에서 마주한 아우릭은 투덜거리기 바빴다. 눈으로는 서류를 살피고 손으로는 사인하면서 입으로는 징징거림이 끊이질 않았다. 도망치려는 기색도 없다. 커다란 단장용 의자가 어색하지 않았다. 일도 안 하고 매일 돌아다니면서도 남의 물건을 취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저것도 참 신기한 재주다. 가진 권력이 어울리는 재주.
날씨가 좋다며 우리 같이 데이트 가자고 찾아왔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측할 수 있었을 텐데, 붙잡혀서 밀린 일만 처리해야 할 걸 알면서도 왜 왔는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어제 오후 복도를 걷다가 코피를 쏟았으니, 아마 그때 주변에 있었던 누군가에게 소식을 듣고 제 상태를 살피러 왔을 것이다.
반듯한 자세와 진지한 표정만으로는 그의 어깨에 걸터진 단장 망토는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다른 단원들이 봐야 했다. 물론 입을 다물었을 때.
“그거야 아우릭, 네가 늘 자리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있잖아. 근데 왜 일이 많아?”
“내일도 있다면 내일 일은 줄어들겠지.”
“음, 내일은 아마 없지 않을까아?”
온 얼굴이 화사하게 피도록 짓는 미소. 턱을 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치 ‘그래도 괜찮지?’ 라고 묻는 듯한 표정에 마주 웃어줄 뻔했다. 말도 안 될 일을 저런 식으로 뻔뻔하게 요구하는 부분이 귀엽지만 지금은 그렇게 느낄 타이밍이 되지 못한다.
“그럼 오늘 해야 할 일이 더 늘겠군.”
그는 급하게 손을 휘저었다. 잘못 들은 거다, 내일도 출근할 거다 줄줄 쏟아지는 변명에 귀를 닫은 베논은 마감일이 넉넉하게 남은 서류까지 전부 정리해 연인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겨우 어깨 높이만큼 내려왔던 서류인데 다시 앉은키를 훌쩍 넘길 정도로 높게 쌓여버렸으니, 성격상 적반하장으로 화를 낼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반항의 의미로 드러눕거나 칭얼거림이 늘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용했다. 예쁘게 휘었던 눈으로 원망스러운 빛을 보내는 그의 입에서는 불만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진지한 눈동자가 서류 위를 훑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집은 펜으로 사각사각 사인을 하는 모습을 보다가 무심코 숨을 삼켰다.
웃음까지 지운 얼굴에서 시선이 떨어지질 않았다. 눈치를 채면 어쩌나, 그런 걱정은 소용없었다. 이미 제가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언제까지 보고 있을까, 궁금해하는 중이겠지.
문득 어제 퇴근길에 봤던 커플이 떠올랐다. 마주 보기만 해도 행복해하던 그들. 함께 할 미래를 약속하고, 웃고 떠들며 모두의 축복을 받았던 그들.
앞으로 다가올 기쁨도 슬픔도 모두 함께하겠다고 다짐하던 목소리가 닫힌 문틈으로 들렸었지. 이어지는 웃음은 마차가 멀리 떨어졌을 때도 들렸다.
다른 곳에서 태어나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자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같은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그런 것이 가능한 일인 걸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남과 어울리는 것이 힘든 제 성격으로는 설사 가문을 위한 배우자가 생긴다고 해도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 하나 없는 상황에서 결혼은 무슨.
베논은 아랫니로 윗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그렇지만 아우릭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처음으로 남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을 때 거부 없이 받아준 그다. 싹튼 감정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릴 때 정답을 알려준 것도 그였고,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그였다. 우정으로 지낸 시간보다 사랑으로 지낸 시간보다 많은 우리는 같은 미래를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아우릭.”
“으응. 왜애?”
종이가 팔락이며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깨를 틀자 명치 위에 있던 반지가 왼쪽으로 약간 굴렀다.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이 둥근 링 위로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우리 결혼할까.”
만난 지 오래되었으니까, 퇴근 후에도 얼굴이 보고 싶으니까, 그런 유치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했다.
아우릭은 멈칫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있을 제 얼굴을 천천히 살피는 눈동자.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아니면 ‘결혼’ 이라는 단어를 지금이라도 주워 담아야 하는 걸까.
느릿하게 훑는 시선에 발가 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펜을 쥐고 있던 손을 치우고, 허공에 들었던 손을 내리자 절반 정도 들춰져 있던 서류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검은 손가락이 펜을 내려놓고, 책상을 톡톡 치자 집무실 가득한 침묵 사이로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소음이 퍼졌다.
연인의 등 뒤로 보이는 창문 밖. 커다란 구름이 잠시 해를 가렸다가 흘러갔다. 바람이 빠른 모양이었다. 나뭇잎 서걱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 보면 아마 위쪽만.
두꺼운 커튼이 끈으로 묶여 벽 한쪽 구석에 치우쳐 있었다. 천장에 닿은 책장에는 이스델라에서 유명한 책들이 빈틈없이 꽂혀 있었고, 수도를 전부 그려 넣은 지도가 돌돌 말린 채 보관되어 있었다. 아직 정리되지 못한 서류들이 바닥에 쌓여있고, 그 앞으로 펼쳐진 보드라운 카펫이 집무실 바닥의 대부분을 덮고 있었다. 거의 살고 있다시피 한 공간을 괜스레 둘러보다가 마르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장갑 안으로 가득 차는 땀을 닦아낼 수 없어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 으음, 하는 소리가 나오자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을 하기 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어졌다.
“으음…”
“.....”
“베논. 나랑 결혼하고 싶어?”
그래. 그렇다고 대답을 해야 했다. 입술을 달싹였지만 혀끝까지 나온 말을 가로막은 건 그의 대답이었다.
“난 싫은데.”
예쁜 미소였다. 화사하기도 했다. 혹시 제가 대답을 잘못 들은 건 아닐까, 고민이 들 정도로 밝은 얼굴.
침묵이 이어졌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가 제게 고백을 하던 순간에 기분이 이랬을까.
아무리 오래 지나도 바래지 않을 기억이 가슴속에서 넘실거렸다. 빠른 대답을 해주지 못한 것이 이제서야 후회되었다. 고민 했을 텐데, 혹여나 같은 감정이 아니면 어쩌나, 많이 생각하고 오래 고민한 끝에 한 고백이었을텐데, 하루라도 더 빨리 대답을 해 줄걸. 뭐가 어렵다고 일주일이나 끌었을까.
베논은 저도 모르게 멈추고 있던 숨을 가늘게 뱉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