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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차를 가져왔사옵니다.”
“그래. 이만 나가보도록.”
궁녀가 찻주전자와 찻잔이 담긴 상을 내려놓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라졌다. 문이 닫히자 로건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열린 창문으로 봄바람이 불어왔다. 좋은 날씨였다. 그럼에도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걷어낼 수가 없었다. 이 나라에 온지 벌써 아흐레나 되었다. 매끈한 도자기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쓸던 로건이 기억을 더듬어 내려갔다.
남쪽에 터전을 잡은 희(曦)나라는 부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풍족하고 사람 살기 좋은 곳이었다. 기름진 땅을 토대로 삼아 나라에는 곡식이 부족한 날이 없었고, 백성들은 인심이 넘쳤다. 백성들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는 황제의 모습과 웃음을 머금은 사람들을 보며 로건은 훗날 아버지 같은 군주가 되겠다고 다짐해 왔다.
“그랬지. 그런데 유(柳)나라가…”
로건이 작지만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현존하는 나라들 중 가장 국력이 튼튼하다 말할 수 있는 북쪽의 유(柳)나라에서 황제가 승하한 뒤 옐킨이라는 젊은 황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자리에 오른 뒤 오래 되지 않아 주변의 작은 변방 민족들의 나라부터 하나씩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마치 배부름을 모르고 뭐든 집어삼키는 구렁이 같았다. 지도에 잘게 조각난 북쪽 땅의 경계선이 지워지고 유(柳)라는 글자가 크기를 키워갈수록 희(曦)나라 대신들과 황제의 불안감도 커져갔다.
그 불안감이 증폭되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이웃 나라가 공격에 무너진 날이었다. 나름 국방이 튼튼한 나라가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 상대했음에도 정복욕을 맛본 그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옆 나라의 깃발이 스러지고 군사들의 피냄새가 진동했다. 비릿한 향은 국경을 넘어와 머릿속에서 적신호를 울리는 촉매제가 되어 대신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입싸움을 벌이게 했다. 희(曦)나라 황제가 급하게 소집한 회의는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백성들을 끔찍이 아끼는 황제가 우선 협상을 해보자는 의견에 힘을 실었다. 화친을 맺자는 서신과 선물들을 들려 유(柳)나라로 사절단을 보냈다. 두 달 후 그들이 가져온 타협안은 절망적이었다. 매년 노비, 포, 곡식과 금은을 바치는 속국이 되거나, 태자를 보내 자신의 아우와 혼인을 맺어 부마국이 되거나. 둘 다 받아들일 수 없다면 피를 볼 수밖에 없다는 말을 전하는 사신들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저의는 뻔했다. 물자를 상시로 꺼낼 수 있는 주머니를 만들거나 다른 나라에게 내보일 상징을 거두는 것. 두 선택지 모두 치욕스럽긴 매한가지였지만, 전자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야 한다. 힘이 없는 나라에 산다는 이유로 백성들에게 짐을 지울 수는 없었다. 로건이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유(柳)나라의 태자와 혼인하겠다 말씀을 올리자 희(曦)나라의 황제는 한동안 로건의 손만 잡고 눈물만 흘렸다. 그에게 괜찮다며 로건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로건이 급히 생각을 떨쳐 냈다. 내관이 들어와 로건의 눈치를 살피며 소식을 전했다. 황자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로건의 미간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앉혀 두고 조롱이라도 할 셈인가?
결혼식 밤, 당연하게도 로건은 합금(合衾)을 원치 않았다. 이불을 같이 덮고 잠을 청하는 것 대신 로건은 그 날 밤을 새워 본국에서 가져온 책을 읽었다. 뒤이어 방에 들어온 베논은 눈길 하나 주지 않는 로건을 잠시 눈에 담고는 금침에 홀로 누워 잠을 청했다. 그 이후로 로건은 베논을 노골적으로 피해 왔다. 그런데 가만히 방 안에 칩거해 있으면 그는 매일 한 번씩은 찾아와 이렇게 보기를 청하는 것이었다. 로건은 차를 찻잔에 따르며 아흐레 동안 숱하게 해온 답을 내놓았다.
“몸이 안 좋다고 전해라.”
“이미 그리 전했사오나 걱정된다며 더욱 더 보아야겠다 이르십니다.”
“…들라 해라.”
이젠 선택지가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더는 찾아오지 말라고 확실히 말해 두어야겠다고 로건은 생각했다. 문이 열리고 베논이 방에 발을 내딛었다. 로건은 일어나 그를 맞지 않고 그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짙은 피부와 다부진 눈매. 그리고 굵은 선으로 떨어지는 콧날. 이전 같았으면 꽤나 수려한 외모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굳게 다물린 입매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간 아팠다 들었다.”
“네, 무척이나 아팠지요. 고국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기 짝이 없더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베논 쪽이었다. 그 말을 뒤틀린 대답으로 받아치며 로건이 냉소를 흘렸다. 염려하는 모양새를 내어 저를 더 비참하게 할 참인가? 타국에 끌려온 것을 동정하는 체하며 속으로는 비웃고 나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겠지. 가시 돋친 마음에 모든 것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로건이 말을 이었다.
“유(柳)나라 황제께서 저를 잘 살피라 이르시더이까?”
“아니다.”
“허면 어쩐 연유로 매일 저를 찾으시는 겁니까?”
“부부된 도리로서 걱정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부부요?”
로건이 기가 차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부부라니. 허울로만 부부지 실상은 강자가 약자에게 씌운 굴레라는 것을 정녕 모르나? 속에서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 로건이 눈을 매섭게 뜨고 가슴속에 묻어둔 화를 꺼내어 말에 쏟아 부었다.
“제가 당신들의 전리품이라는 것쯤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황위 계승자를 황자와 혼인시켜 궁 안에 붙잡아 두는 건, 희(曦)나라를 발 아래 두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표식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얼마나 저에게 더 모욕을 주실 생각이신지요?”
“……”
베논은 대답하지 않고 까만 눈으로 로건을 담담히 응시할 뿐이었다. 역정을 낼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 모습에 더 부아가 치밀었지만 이대로는 치부와 열등감을 전부 드러낼 것 같아 로건이 애써 불붙은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다. 입술을 깨물고 숨을 찬찬히 몰아쉰 뒤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정녕 저를 걱정하신다면 없는 사람처럼 여겨 주십시오. 더 하실 말이 없으시다면 일어나 보겠습니다.”
몸을 일으켜 그를 지나쳐 갔다. 그가 고개를 돌려 제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베논의 시선이 닿지 않는 모퉁이를 돌아 나오고 나서야 로건은 거친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