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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은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평소에 잠이 들던 시각을 훨씬 넘겼는데도 정신은 점점 맑아져 갔다. 맑아진 정신은 낮에 있었던 일을 반복하여 끄집어냈다. 자신을 무덤덤하게 담던 암흑 같은 눈동자 너머엔 뭐가 있었을지. 로건은 그의 속내를 쉬이 읽을 수 없었다. 그는 꼭 표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혼례식 때도, 자신에게 말을 걸 때도 늘 한결같았다. 걱정된다는 말을 하려면 걱정 어린 낯빛이라도 띄워야 할 텐데 말이지.

 

그 순간 어지럽던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고 의문이 솟아올랐다. 내가 왜 그를 생각하고 있지? 로건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눈꺼풀에 감춰져 있던 투명한 물빛 눈동자가 요동쳤다. 숨을 크게 들이키고 손끝이 파리해질 정도로 자줏빛 이불을 꽉 쥐었다.

 

의문은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헤집어 놓더니 곧 앙금이 되어 가라앉았다. 이게 다 그가 쓸데없는 발걸음을 한 탓이다. 다시 머릿속에서 떠오르려는 얼굴을 고개를 흔들어 떨쳐내고 숨을 길게 내뱉었다. 잠이 오지 않으니 밤산책이라도 해야 할 듯싶었다. 로건이 일어나 간편한 외출복을 챙겨 들었다.

 

아직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긴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로건이 옷깃을 여미고 발을 옮겼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커다란 호수 쪽으로 가 볼 생각이었다. 새카만 밤하늘에 그믐달이 은은하게 떠 있었다. 천천히 걸으며 그 주변에 박힌 별들을 헤아려 보았다. 희()나라에서 세던 것과 꼭 같았다. 본국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별은 그대로였다. 그리운 것들이 하나씩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끔찍이 아끼는 여동생. 가슴이 시려왔다. 새벽 찬 공기를 들이마신 탓이라고, 로건은 애써 그렇게 여겼다.

 

조용히 밤산책을 하던 중 숨을 죽인 발소리가 로건의 신경을 건드렸다. 발소리는 로건이 걸음을 멈추면 사라졌다가 걸음을 옮길 때면 다시 시작되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어 등줄기가 오싹했다.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애써 티를 내지 않으려 로건은 고개를 바로 세우고 천천히 걸으며 발소리와 자신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오십 보 뒤인 것 같기도 하고, 삼십 보 뒤인 것 같기도 한데... 왼편인가, 아니면 오른쪽? 아. 로건이 마른침을 삼켰다.

 

하나가 아니었다. 적어도 셋은 되는 발소리가 뒤에서 각자 격차를 달리해 로건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발소리의 간격이 점차 짧아지자 로건은 걸음을 재촉해 걷다가 뛰기 시작했다. 로건을 쫓던 사람들은 당황한 듯 주춤거리더니 그를 좇아 달음박질쳤다. 타국에서 로건을 보호해 줄 사람은 없었다. 잡히는 순간이 곧 죽음에 이르는 순간일 것이다. 방향을 틀 생각도 못한 채 곧장 달리던 로건은 호수 위의 누각에 다다랐다. 마음이 급해 올곧게 뛴 탓에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이런. 로건이 입술을 짓이겼다. 앞은 밤하늘만큼이나 새카맣게 보이는 호수였다. 호수는 로건 몸 하나는 가뿐하게 집어삼킬 수 있다는 듯 고요하게 일렁였다.

 

로건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몸을 돌렸다. 검은 복장으로 밤의 그림자에 몸을 감춘 세 명의 자객과 로건의 시선이 무섭게 맞부딪혔다. 그들은 일제히 칼을 빼어 들고 포위망을 서서히 좁혀왔다. 한 명씩 차분하게 상대한다면, 빠져나갈 길이 생길지도 모른다. 로건은 스스로를 다잡으며 저에게 칼을 겨누는 세 명의 몸짓을 주시했다.

 

왼편의 사람이 먼저 로건에게 달려들었다. 칼이 호선을 그리며 다가오자 로건은 몸을 비틀어 피하고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칼이 빗맞아 기둥에 튕겨 나올 때를 노려 로건은 그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숨이 멎는 고통에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발로 차 넘어뜨린 뒤 손을 못 쓰도록 가차 없이 뭉개 버렸다. 곧이어 다른 사람이 칼을 들고 로건에게 덤벼들자 로건은 그의 팔을 붙잡고 팽팽히 대치했다.

 

칼이 목 언저리까지 밀고 들어오자 목숨의 경각을 재는 서늘한 감각에 절로 소름이 돋았다. 복면을 쓴 자는 로건보다 완력이 강했다. 로건은 정자 끝으로 내몰렸다. 난간에 기대어 그를 밀어냈지만 칼날이 턱 밑에 날카롭게 자리잡았다. 로건이 허리를 뒤로 젖혀 칼을 피하다 잠시 균형을 잃었다. 발이 딛고 설 곳을 잃고 공중에 뜨는 순간 몸이 아래로 기울어졌다. 로건은 자신이 누각 밖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자각했고 그 순간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물이 온몸을 덮쳐왔다.

 

로건은 헤엄을 칠 줄 몰랐다.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움직여 봤으나 점점 그믐달의 희미한 빛이 아스라이 사라져갈 뿐이었다. 오히려 팔을 휘저을수록 더 깊이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연꽃의 줄기가 팔을 휘감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공기 대신 탁한 물이 목으로 들어찼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점점 힘에 부쳤다. 그 순간 옆에서 큰 물결이 일었다. 로건이 눈을 흐릿하게 뜨자 검은 인영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제 끝이구나. 비참한 마지막을 예감하며 몸의 힘을 풀었다. 곧 칼에 찔리겠지. 그러나 와 닿는 것은 차가운 금속이 아닌 숨을 불어넣어주는 따뜻한 입맞춤이었다. 로건은 밀려들어오는 숨에 정신이 조금 드는 것을 느꼈다. 팔을 감은 연줄기가 거칠게 끊어지더니 누군가가 제 허리를 한 손으로 감고 수면 밖으로 끌어올렸다.

 

 물 밖으로 나온 로건이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땅에 엎드려 흉부가 찢어질 듯 기침을 토해내자 삼킨 물이 밀려나왔다. 큰 손이 부드럽게 등을 쓸었다. 기침과 떨림이 점점 멎어 들자 로건은 고개를 들어 저를 다독이는 사람을 찾았다. 로건의 두 눈이 보름달처럼 커졌다.

 

“당신이…왜…”

 

오후에 마주했던 담담한 베논의 얼굴에 로건이 할 말을 잃었다. 베논은 말없이 로건이 어디 다친 곳이 없는지 면밀하게 살폈다. 로건의 몸에 생채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그의 머리에 붙어 있던 작은 꽃잎 하나를 떼어주고는 몸을 일으켜 누각 쪽으로 향했다. 자박자박. 규칙적인 발걸음이 한 자객의 앞에서 멎었다. 찰나의 정적을 깨고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가 보냈는가?”

 

 “으윽…”

 

돌아오는 답이 없자 베논이 복면을 벗겨내고 목을 움켜쥐어 숨을 막았다. 자객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기 시작했다. 손의 악력을 조절하여 숨통을 살짝 틔워 주었다가 다시 옥죄는 것을 반복하였다. 자객이 숨이 막히다는 듯 오른손으로 가슴을 쥐어뜯었다. 교묘하게 손을 옷 속으로 감추더니 단도를 꺼내 베논을 향해 휘둘렀다. 미처 피하지 못한 탓에 칼은 베논의 왼쪽 팔뚝의 살갗을 베어냈다. 베논의 미간이 구겨짐과 동시에 입에서 단말마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베논은 목을 조르던 손을 턱과 뒤통수에 가져다 대고 무릎으로 상체를 단단히 고정시킨 후 자객의 목을 비틀었다. 우두둑. 뼈가 어긋나는 생경한 소리와 함께 그의 숨이 끊어졌다.

 

로건이 몸을 일으켜 베논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아까 저와 대치한 세 명이 누각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젠 안전하다는 판단이 서자 로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베논이 자객을 제압하고 저를 구하러 물로 뛰어든 것 같았다. 헌데 어째서? 어째서 본인이 다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을 지켜주려고 하는지 로건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베논이 몸을 일으키다 작게 신음하며 어깻죽지를 움켜쥐었다. 상처 난 팔을 매만지자 손에 진득하게 피가 묻어났다.

 

그가 적국의 황자임을 떠나, 우선 사람된 도리로써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치료해주는 것이 옳겠지. 로건이 가까이 다가가 베논의 팔을 살폈다. 우선 지혈을 해야 했다. 우선 지혈을 해야 했다. 덧나지 않도록 상처를 깨끗이 씻고 붕대를 감는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로건이 베논의 윗옷 앞섶을 풀어 헤쳤다. 단단한 어깨에 걸쳐져 있던 옷을 내리고 상처를 확인하자 베논은 놀라는 눈치였지만 그를 저지하지는 않았다. 칼에 꽤나 깊게 베였는지 상흔이 깊었다. 검붉은 피가 팔을 타고 내려와 손가락 끝까지 적시고 있었다. 로건이 제 허리에 둘러진 천을 풀어 베논의 팔에 감았다. 금세 천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흘러내리지 않도록 단단히 매듭을 지은 로건이 입을 열었다.

 

 “의원을 부르시지요.”

 

 “별로 큰 상처도 아니니, 괜찮다.”

 

 “피가 이렇게 흐르는데도 말입니까? 치료가 필요합니다.”

 

 “구태여 한밤중에 그들을 불러내고 싶지는 않다. 나 스스로도 치료할 수 있다.”

 

베논이 다시 옷을 걸쳐 입고 무뚝뚝하게 말하자 로건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식으로 빚을 지는 것은 로건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가 쉬는 게 좋겠군. 베논은 자신을 공격했던 자객의 단도를 주워 품에 넣고 발걸음을 돌렸다. 로건의 목소리가 그를 급히 붙잡았다.

 

“…그렇다면 제가 치료하게 해 주십시오.”

 

베논이 놀란 표정을 어둠 속에 숨겼다. 로건을 등진 상태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로건은 베논을 앞질러 자신이 거처하는 곳으로 향했다. 베논이 그 뒤를 천천히 따랐다. 새벽녘 그믐달이 구름 안으로 몸을 숨기며 빛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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