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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을 거절한 아우릭은 그 후로 삼일 동안 신전에 나타나지 않았다.

 

 늘 있던 일이다. 일터에서는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연인. 그러나 퇴근할 시간이 되면 귀신같이 나타나서 곁에 붙어 있었는데,삼일 전부터는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헤어진 걸까. 다른 커플들이 그렇듯 하나가 어긋나면 그 뒤의 일도 줄줄 어긋나서 결국에는..

 

 ‘부단장’ 이라는 글자 옆에 제 이름을 써넣은 베논은 한숨을 쉬며 서류를 덮고, 다음 서류를 펼쳤다. 작은 글씨가 지렁이처럼 기어 다니고 있다. 손가락으로 눈꺼풀 위를 꾹꾹 눌렀다. 쉬지 못하고 내내 흰 종이와 검은 글자를 번갈아 보던 눈이 뻑뻑했다.

 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푹 기댔다. 어깨가 아프고, 목뒤가 빳빳하게 당겨왔다. 책상은 제 몸에 맞게 만들어져 불편하지 않았지만, 일정 시간이 넘어가도록 앉아있으면 아무리 좋은 소재로 정성 들여 만들어도 소용없었다.

 정확한 시간을 따져보지 않았지만, 아침에 해가 뜨기 전부터 앉아서 달이 머리 위를 넘어갈 때까지 있었으니 이 정도만 아픈 것이 신기할 수준이었다.

 본인의 기분에 따른 것이지만, 단장인 그가 찾아와 마무리된 서류들이 제법 많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앉은키보다 높게 쌓아준 서류를 징징거리면서도 전부 끝내준 덕분에 집무실 내부도 환해졌다. 처리가 끝난 서류를 보내고 나니 원래 이 공간이 이렇게 넓었나 싶을 정도였다.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예 얼굴을 보이지 않은 삼일 동안은 잘 지냈을까.

 한 번은 너무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다. 매일 밖을 돌아다니냐고. 아니면 아침에 일어나지 않고, 출근 시간 상관없이 집에서 머무는 거냐고.

 뭘 먹은 건지 볼에 생크림을 묻힌 채 걷던 그는 제 얼굴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인지, 일은 하지 않고 어딜 돌아다니느냐 잔소리를 하기 위해 물어보는 것인지 가늠하는 듯, 시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었다.

 쌀쌀한 날이었다. 낮은 밝게 뜬 해로 추위를 느낄 새가 없었지만, 밤이 되면 부는 바람에 찬 기운이 돌 시기였다. 추운 날씨에 꼭 걸쳐줘야겠다던 단장 망토를 단호하게 거절했더니 입술을 삐죽거리던 그는 묻는 말에 대답 정도는 해줘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곧 다른 의도가 없는 순수한 궁금증임을 알아챘는지, 그는 펼친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나올 때도 있고, 늦잠을 자서 점심을 먹고 나올 때도 있는데 대부분 시장에 가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을 사 먹는다고 말했다. 필요한 물건을 직접 사러 다니기도 하고, 가끔 제게 주고 싶은 선물을 사기도 한다며 웃었다.

 예를 들어서 오늘 한 일을 말해주겠다며 아침부터 해온 일을 하나씩 말할 때마다 굽혀지는 손가락은 딱 달라붙는 검은 장갑 위로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으면 했다. 서로 약속을 하고 목에 걸었던 것 말고, 지금까지 그래왔듯 미래에도 함께 하자고 약속하는 증표를 끼워줬으면. 그래서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든 제 생각을 해줬으면.

 

 그날 봤던 커플의 얼굴이 떠올랐다. 청혼을 거절당한 이후로 꾸준히 머릿속을 맴돌며 하루에 한 번 이상은 그들을 생각했다. 스타 캐처가 흔들리는 길거리에서 손을 잡고,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오로지 둘만 있는 것처럼 밝게 빛났던 모습.

 남자가 입었던 하얀 턱시도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가슴에 매달린 반지 위로 손을 얹었던 건 제 연인도 그 옷이 잘 어울릴거라 생각해서였다. 검은색보다는, 새하얀 턱시도가..

 

 똑똑. 노크 소리에 정신이 깼다. 문고리가 돌아가고 빼꼼 얼굴을 내민 크루세이더 단원 한 명이 저와 눈을 마주치더니 지나치게 놀란다.

 

 “죄,죄,죄송합니다! 아까부터 말씀이 없으셔서 무슨 일이 있으신 줄 아,알았습니다! 저번에 코피를 흘리셨다는 소식을 들어서!”

 

 높은 톤으로 얼굴이 빨개지도록 소리를 질러 말하는 단원을 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귀가 아픈 건 둘째치고 머리가 쿡쿡 쑤셔왔다.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손바닥을 펼쳐 보이자 그제야 헙, 소리를 내며 입을 막고 죄송하다며 조용하게 속삭인다.

 

 “무슨 일이지.”

 “그게, 얼마 전부터 식사를 자주 거르시고, 그러다가 코피도 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단원들은 부단장님의 건강을 챙겨드리기 위해 식사 시간을 빼먹지 않으시도록 알려드리기로 정했습니다. 혹 불편하시더라도,”

 “결론만 말해라.”

 “식사 시간이십니다! 지금 내려오셔서 식사를 하셔야 저희 크루세이더가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원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찌나 겁을 먹었는지 꽉 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베논은 책상을 짚고 일어섰다. 의자가 부드럽게 뒤로 밀리자 어버버하며 문을 활짝 열어준다.

 복도를 걸으며 뒤따라오는 단원의 이야기를 들었다. 식사 메뉴는 무엇이고, 이번에 처리하기로 한 일은 전부 잘 되어 곧 보고드릴 예정이고, 어쩌고 저쩌고 이어지는 말들이 귀를 스치고 반대쪽으로 빠져나간다. 덥다. 땀이 흐르지도 않는데 손등으로 턱 아래쪽을 쓸었다. 장갑 위로 후끈한 기운이 스쳤다. 설마 열이 나는 건가.

 

 “부단장님?”

 “..그래.”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창백하십니다.”

 “신경쓰지 마라.”

 “네..”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던 단원은 최근 크루세이더의 업무와 짧은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성과를 올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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