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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난감하다고 느낄 법한 상황. 어린 베논은 한숨 먼저 쉬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누워있는 친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라, 아우릭. 옷이 더러워진다.”
“싫어! 빨리 대답해줘!”
팔다리를 버둥거릴 때마다 바닥에서 흙먼지가 폴폴 올라왔다. 길을 걷다 말고 갑자기 누워버리는 탓에 보는 사람도 많았다. 하얀 와이셔츠와 무채색의 면바지에 지저분한 것이 덕지덕지 붙는다. 옆에 선 하인들은 떼를 쓰는 피비앙스 도련님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지도 못하고, 가만두고 보지도 못하겠다는 어정쩡한 자세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난 떼쓰는 사람은 싫다.”
“떼 안 써!”
“지금 하는 건 뭐지?”
“이건.. 이건 적극적으로 내 의견을 이야기 하는 거야!”
어련하시겠어.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입술을 삐죽거리며 어기적 어기적 몸을 일으킨다. 머뭇거리던 하인들은 바로 달려와 귀한 도련님의 옷을 탈탈 털어주었다.
그는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고, 잃기 싫은 친구였다. 그래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무른 행동을 많이 했다. 싫다는 거절은 한 번 더 망설였고, 맞지 않으면 억지로 맞춰가며 좋다고 하기도 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제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십 년 동안 곁에서 손발이 되어준 이들도 놀랄 정도로.
어린 아우릭은 한껏 입술을 내밀고 발을 쾅쾅 굴렸다. 징징거림 사이로 정말 억울한 기색이 스몄다. 제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니까 안 들어주면 형 밉다며 드러누워버리는 못된 버릇이 들어서..
“왜 나랑 결혼 안 해줘?”
당연하게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웃겼지만, 소리 내 웃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눈물을 터트리며 다시 드러누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땀을 흘리며 옷을 정돈해주는 사람들을 봐서라도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말했지. 난 떼쓰는 사람은 싫다.”
“떼쓴 거 아닌데..”
바닥을 기는 목소리에 네 말이 맞다고 해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눈꼬리가 약간 촉촉한 걸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어차피 진짜 결혼할 것도 아닌데 적당히 맞춰줄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 받아주지.
우리는 아직 어렸다. 사랑이니 뭐니 하는 감정은 어른들의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처음 사귄 친구니까 좋고, 소중하지만 그건 들어왔던 사랑의 감정과는 다르다고 믿었다.
사랑이라면 좀 더 반짝반짝하고 예쁘게 빛나야 하는 것 아닐까. 작고 귀여운 친구는 반짝거리고 예쁘지만 그것과 다르게 조금 더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그렇게 말했으니까.
평소처럼 쉽게 넘어가 주지 않을 것임을 알아챘는지, 어린 그는 종종 다가와 제 팔을 양손으로 덥석 잡고 어깨를 양옆으로 흔들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기 시작한다.
“현실을 생각해라, 아우릭. 고작 열 살에 무슨 결혼을,”
“그래도 할래! 형 나랑 해! 결혼 나랑 하자!”
“....”
“하자아… 응? 나랑 해, 결혼. 지금 싫으면 커서 하자아..”
그와 결혼하기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런 감정을 사랑이라고 말하는지 몰랐다. 매일 보고 싶고, 생각나고, 두근거리는 마음이 특별한 친구라면 다 느끼는 것인줄 알았다. 만에 하나 사랑이라는 걸 알았다고 해도 시기가 너무 빨랐다. 아홉 살과 열 살인데.
노을이 지고 있었다. 해가 저물면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시장은 복작거렸고, 기분 나쁘지 않은 소음이 거리 곳곳에 퍼졌다.
장을 보고 손에 커다란 바구니나 봉투를 하나씩 쥔 채 지나가던 사람들은 은발머리 아이가 흑발 아이를 많이 좋아하나봐~ 하며 귀엽다고 웃었다. 그렇지만 저는 할 수만 있다면 방금 전 하인들과 같이 안절부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벌써 촉촉해진 눈가. 긴 속눈썹이 젖어있다. 얇은 눈꺼풀이 감겼다 뜨일 때마다 서러움이 더해지는 듯했다. 입을 다문 채 대답을 하지 않자, 훌쩍거리며 코를 먹기 시작했다.
어쩌지. 그를 만나러 오기 전 아무리 친구라 하더라도 아이가 피비앙스이고 제가 야니크인 이상 너무 무르게 굴면 안 된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이번에는 절대 넘어가지 말아야지.
힐끔거리며 눈치만 보자 결국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은 아우릭은 양 다리를 버둥거리며 엉엉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이제 형이라고 안 할 거야! 나중에 꼭 베논이랑 결혼할 거야! 근데 그때는 베논이 고백해!”
“일어나라니까.”
“고백 두 번 해! 한 번은 방금 베논이 한 것처럼 내가 뻥 차줄거야.. 그리고 두 번째에 받아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