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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면.
“기억났어?”
“..설마 그 말을 직접 실행에 옮기겠다고 거절한 건 아니겠지.”
“맞는데?”
어깨를 으쓱인 아우릭은 단장 책상에 앉아 있었던 삼일 전처럼 턱을 괴고 웃었다. 얄미울 법도 한데 먼저 안심이 되었다.
베논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일단 헤어지지 않았고, 제 청혼을 거절한 이유가 정말 싫어서가 아니라는 부분에 기운이 쭉 빠져서 그대로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어린 시절에 본인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는 점이 참 그 다워서 따지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동안 못 온 거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물건 찾느라 고생 좀 했으니까 봐줘.”
비장한 눈빛으로 변한 그는 단장 망토를 걷어내고 자켓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다시 빠져나오는 검은 장갑 위에 놓인 네모난 케이스.
남색 벨벳 재질의 천이 둘러싸인 상자 끝에는 금으로 장식된 조그만 손잡이가 달려 있다.
“이건 목걸이로 하지 말고 손에 끼기로 약속해.”
“.....”
“이 정도 나이가 됐으면 결혼해도 되는 거 맞지?”
케이스의 뚜껑이 열자 그리 굵지도 얇지도 않은 은색 링, 스며드는 것처럼 쏙 박인 검은 보석, 대부분의 시간을 장갑 끼고 지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 같은 두께, 크기가 다른 반지 두 개가 보였다. 끼워보지 않아도 손가락에 딱 맞는 호수로 보였다.
그는 청혼을 하기 위해 예쁜 디자인을 고민하고, 주문을 해서 받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 사이 제가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며 투덜거렸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조심해서 계획한 거 다 들킨 줄 알았다구.”
"..내가 두번 해야 받아준다고 하지 않았나."
“아아, 그러려고 했는데.”
그때 우리 사이로 쟁반이 하나 불쑥 들어왔다. 눈치를 보던 단원은 인사를 하며 들고 있던 것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긴장을 했는지, 쟁반 위에 있는 수저가 덜그럭거리는 행동에 쟁반 가장자리로 굴러갔다. 얼굴만 한 크기의 둥근 그릇과 김이 폴폴 올라오는 흰죽. 작은 접시에 담긴 간장 장조림 하나.
두 간부 사이에서 방황을 하던 눈동자가 정확하게 조명을 받아 빛나는 반지로 향했다. 식당의 소음 때문에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한 유일한 사람 같았다.
당혹감이 스치는 단원의 표정을 보는 둥 마는 둥 고맙다고 인사를 한 그는 케이스를 내려놓고 제 손을 잡았다.
“둔하기로는 짝도 없는 베논이 두 번 청혼하는 걸 기다리다가 그전에 헤어지자고 뻥 차일 것 같아서. 실은 첫 번째 청혼도 안 할 줄 알았어. 난 꼭 베논이랑 결혼하고 싶단 말이야. 마냥 기다리다가 할아버지가 될 것 같았다구.”
“그건..”
“거봐. 아니라고도 못하겠지? 방금 전까지도 우리가 헤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잖아.”
못 말린다며 고개를 양옆으로 도리도리 저은 연인은 손가락 끝을 세워 흰 장갑을 손목부터 잡아 천천히 벗겼다. 엄지로 드러나는 맨손등을 어루만지고, 고개를 숙여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중얼거린다.
“사실 오늘 저녁에 말하려고 했어. 베논은 무리하면 열나잖아. 얼마 전에는 코피도 흘리고. 그래서 점심에 죽 먹이고, 약도 먹이고, 특별히 일도 내가 해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고기를 썰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푹 자고 일어나면 멋있게 짠~ 해주려 했더니. 눈치도 없고, 아프기나 하고.”
“..아우릭.”
“공개적으로 말하면.. 불편하게 느낄까 봐 둘만 있을 때 하려고 했는데, 아.. 정말. 설마 했는데 정말 헤어진 줄 알고 있으면 어떡해. 이 둔탱이에 멍청이. 그때는 어리다는 핑계로 드러누운 거지.. 진지하게 말하는데 남들 시선 때문에 억지로 받아주고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조용히 말할 거야. 베논만 들어.”
“.....”
“결혼하자, 우리.”
어느새 식당을 가득 채우고 있던 소음은 사라졌고,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크루세이더, 피스메이커 할 것 없이 시선을 우리에게로 향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장갑이 벗겨내고 케이스에서 크기가 조금 더 큰 반지를 꺼내 약지에 끼워준 그는 미소를 지었다.
아우릭 또한 만난 지 오래되었으니까, 퇴근한 후에도 얼굴이 보고 싶으니까, 그런 유치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답지 않게 말이 길었다. 장난스러운 어투를 가장하고 있는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모습이라 새롭기도 하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믿고 제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는데, 주변이 조용해졌음을 이제서야 깨달았는지 점점 빨개지는 연인의 얼굴 아래로 그날 커플 중 한 사람이 입었던 하얀 턱시도를 그려보았다.
전혀 어색하지 않을 그 모습을 떠올리자니, 우습게도 앞으로 같은 미래를 그리는 일에도 힘이 덜 들어갈 것이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남들보다 긴 시간을 알아왔으니까.
베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환하게 웃어줬으면 했다. 원하는 답을 들었다고 만족스러워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