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건이 거처하는 궁을 나와 베논은 곧바로 옐킨의 침소로 향했다. 황제께서 침수에 드셨다며 앞을 막아서는 내관에게 급한 일이라며 황제를 깨우라 재촉했다. 그러다 제 명이 재촉 당하겠다며 대꾸하려던 내관은 황자의 상처입은 팔과, 시체 세 구가 발견되었다는 보초병의 전갈에 입을 닫고 베논의 말에 따랐다. 황제의 방에 불이 켜지고, 내관이 문을 열어주며 고개를 숙이자 베논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곧 베논의 눈 앞에 아직 잠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한 황제이자 형님인 옐킨이 자리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이리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냐, 동생아.”
잠이 내려앉은 눈두덩이를 손으로 꾹꾹 누르던 옐킨이 물었다. 그의 시선을 받아내며 베논이 손을 소매 안으로 숨겼다. 형님을 상대로 처음으로 하는 거짓말이었다. 평소와 같게… 숨을 옅게 들이쉬고 베논은 무게 있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궁 안에 폐하를 해하려는 자객이 들었습니다.”
“자객이라니?”
늑대와 흡사한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옐킨은 매서워진 눈초리로 베논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몸이 꿰뚫리는 기분에 베논이 마른침을 삼키고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했다. 옐킨의 눈이 붕대에 감긴 베논의 오른쪽 팔에 가 닿았다. 그는 구태여 묻지 않고 동생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격연루(闃蓮樓)에서 그들을 처리하고 오는 길입니다.”
“더 자세히 말해보거라.”
“희(曦)나라 황태자가 거처하고 있는 궁을 통과하여 폐하가 침수에 드시는 곳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쫓아가 숨을 모조리 끊어 놓았습니다.”
“배후가 누구인지 밝혀야하지 않느냐?”
짙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가 눈으로 베논에게 왜 자객을 죽였냐 돌려 묻고 있었다. 베논이 품 안에서 단도를 꺼내어 공손히 옐킨에게 내밀었다. 단도를 받아 들고 칼자루에 새겨진 무늬를 유의 깊게 살펴보던 옐킨이 가장자리에 새겨진 글자 하나를 발견하고 손을 멈췄다. 손가락 끝으로 글자를 더듬어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주(周)…”
“재상들 중에 주(周)씨 성을 가진 이는 하나지요.”
주손원 재상… 그의 이름이 쓴 알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옐킨은 미간을 좁히고 혀를 굴려 이름 석 자를 입에서 되뇌었다. 그는 단도를 빼어 들더니 칼에 방울진 핏방울을 손가락으로 쓸어 모았다. 손에 묻어난 피를 만지작거리며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베논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굳이 희(曦)나라 황태자가 머무는 곳을 거쳐 왔는지 모르겠구나. 황제궁과 그리 가깝지 않은 곳인데 말이지.”
그것이 정말 순수한 궁금증에서 온 것인지, 짚이는 부분이 있어 물어보는 것인지 베논은 형님의 의중을 읽을 수 없었다. 어느 쪽이던 미심쩍은 부분을 남겨선 안 된다. 베논은 형님을 존경하는 만큼 그의 치밀함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뱀처럼 약삭빠른 그는 의심이 가는 것이 있다면 끝까지 붙잡고 늘어질 것이다.
“현재 그 곳의 경비가 많이 약하더군요. 약소국의 황태자를 지켜줄 필요는 없다며 보초병들이 의무를 다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또한 발각되었을 때, 폐하가 아닌 타국의 황태자를 노렸다는 변명을 하기 쉽겠지요.”
“……”
옐킨은 더 이상 깊게 묻지 않았다. 내관을 시켜 무관들을 불러 모았고, 주손원의 집에 가 그를 끌어내라는 명령을 내린 후 로건이 머무는 궁의 경비를 강화하라 일렀다. 황제를 받드는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옐킨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뿐인 아우의 왼쪽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네가 내 목숨을 구했구나.”
“……”
“보답으로 청을 하나 들어주마. 혹 원하는 게 있느냐?”
“…나중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생각이 나면 언제든 말하거라.”
베논이 예의를 갖춰 인사를 올리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궁을 나서 아무렇게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와 멀어지고 나서야 베논은 편안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니 불이 꺼진 로건의 침소가 눈에 들어왔다. 자석에 이끌리는 철붙이처럼 이곳을 찾은 베논은 처음 마주하는 자신의 면모가 낯설기 그지없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추접한 주(周)재상의 비명소리가 들릴 때 즈음에서야 그는 자리를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