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하옵니다만, 불가합니다. 직접 출입하셔야 합니다.”
책을 읽고 싶으니 가져와 달라는 로건에게 내관이 곤란하다는 듯 답했다. 황궁 안에 도서관이 있지만 황족들만 들어가 책을 열람할 수 있다는 내관의 말에 로건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희(曦)나라의 황족들과 마주할 것이 뻔했기에 밖으로 나가기가 껄끄러웠다. 벌써부터 그들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선했다. 나, 은연중에 두려워하고 있구나. 자신이 언제부터 이리 약해져 있었는지. 그러나 타국에 홀로 남겨졌다고 해도 자신의 희(曦)나라의 황태자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를 가던 당당하고 위엄 있는 태도를 잃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며 로건이 스스로를 채찍질하였다.
“도서관으로 안내하도록.”
품위 있는 미성의 목소리에 내관이 평소보다 공손히 허리를 굽혀 명을 받들었다. 그래, 저 자도 한 나라의 황위를 이어받을 황태자였지. 새삼 그 사실을 피부로 느낀 내관은 짧은 시간동안 그가 로건에게 감화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
유(柳)나라의 서고는 굉장했다. 본국에서 보던 것보다 두 배는 큰 서장들이 빈틈없이 책을 품고 열을 맞춰 서 있었다. 끝을 가늠하기도 힘들 정도로 서장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로건이 감탄을 터뜨리고 조심스레 발을 뗐다. 역사, 천문, 의술, 병법, 문학… 책장들 사이를 지나며 빠르게 제목들을 눈으로 훑고 갈래를 짐작했다. 희(曦)나라에서 이름난 문장가의 책을 발견해 잠시 반가움을 느끼고 다음 서가로 넘어가자, 책을 펼쳐 탐독하고 있는 베논이 눈에 들어왔다. 인기척에 베논이 고개를 들자 두 시선이 묘하게 얽혔다. 이렇게 마주칠 거라 생각은 못 했는데. 로건이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로건이 어색하게 눈인사를 하자 베논도 고개를 끄덕여 답하고 이내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로건이 서가 앞에서 꽤 오랫동안 헤매자 베논이 물어왔다.
“찾는 책이라도 있는가?”
“아…!”
“……”
“안식국(安息國)에 관한 책을 읽고 싶습니다.”
갑자기 말을 걸어와 놀란 로건이 짤막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대답했다. 안식국(安息國)이라… 이쪽으로 오지. 베논이 읽던 책을 접고 안내했다. 그는 이곳에 훤해 보였다. 꽤나 깊숙이 안으로 들어가 모퉁이를 돌자 다른 나라들을 설명하는 책들이 담긴 서가가 나왔다. 이 책장의 첫 번째 칸이다. 베논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로건이 시선을 옮겼다.
“……”
책장이 높아 첫 번째 칸에 꽂혀 있는 책들은 제목조차 보이지 않았다. 팔을 뻗어 아무 책이나 빼내려 했으나 손가락은 책의 밑부분만 아슬아슬하게 스칠 뿐이었다. 베논은 까치발을 하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로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로건이 집으려던 책을 손쉽게 빼내어 로건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작게 고마움의 표시를 한 로건이 책을 받아 들었다. 책 제목을 확인한 로건의 애매한 표정을 짓다 책을 몇 장 넘기고는 이내 책 표지를 덮었다. 그 모습을 본 베논이 로건의 손에서 책을 가져가 원래의 위치로 돌려 놓았다.
“책이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군.”
“이 나라의 역사보다는 현재의 모습을 알고 싶습니다.”
“현재의 모습?”
베논은 잠시 고민하다 읽던 책을 내려놓고 로건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실례하지. 이윽고 베논은 로건의 허리에 팔을 감아 그를 가뿐히 들어 올렸다. 로건이 균형을 잡으려 무의식적으로 베논의 어깨를 짚었다. 내려놓으라고 발버둥칠까 생각했지만 이 행동이 자신을 위한 호의인 것을 알았기에 밀어낼 수도 없었다. 로건의 눈높이에 맞춰진 책들이 그것을 방증하고 있었다. 공연히 그가 저를 구해주었던 기억이 떠올라 가슴 부근이 뻐근하게 아리었다. 로건이 떨리는 손으로 사신(使臣)이 쓴 기행문을 집어 들자 베논이 그를 내려 주었다. 가까이 붙어있는 그의 품에서 은은한 채송화향이 났다. 로건은 그를 치료해주었던 며칠 전의 일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 베논의 오른팔로 시선을 옮겼다. 베논이 그런 로건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의술에 조예가 깊은가 보군.”
“예?”
“채송화가 외용약으로 쓰이는 걸 알고 그리 치료해준 것 아닌가?”
베논이 내려놓았던 책을 집어 몇 장 넘기더니 손가락으로 문장을 짚어가며 책에 쓰인 내용을 소리 내어 읽었다. 채송화는 성질이 차고 맛은 쓰며, 햇볕에 말리거나 생즙을 내어 환부에 바르거나 짓이겨 붙이는 형태로 사용한다. 칼에 베인 상처, 타박상, 화상을 개선하는데 도움을 준다. 베논이 책에 주었던 시선을 떼고 로건을 바라보자 괜히 민망해진 로건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조용히 말했다.
“관심이 있어 책을 조금 뒤적였을 뿐입니다.”
“그렇다 하기엔 솜씨가 훌륭한데.”
“칭찬, 감사합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로건이 급히 책을 피고 고개를 숙였다. 책의 첫 장에는 안식국(安式國)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이국적인 모습에 매료된 로건은 금세 책에 빠져들었다. 교역과 상업의 중심지라는 명성에 걸맞게 북적북적한 시장,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 처음 보는 향신료, 화려한 무늬의 복식…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은 로건이 책 한 권을 다 읽었을 때 해는 이미 서산을 향해 기울고 있었다. 그 앞에 베논이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서 책을 읽고 있었다. 창문 너머의 황금빛 석양이 그에게 드리우자 빛은 얼굴의 굵은 선을 타고 흘러내려 그림자를 만들었다. 어쩐지 그의 눈이 열리고 닫힐 때에 맞춰 심장이 뛰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고개를 들자 로건은 재빨리 시선을 피해 책장으로 몸을 돌렸다. 베논이 다가와 손을 내밀어 책을 달라는 의사를 표했다. 로건이 책을 건네 주자 베논은 책을 원래 자리로 돌려 놓으며 로건에게 말을 걸었다.
“책은 유익했나?”
“네, 무척이나 흥미로웠습니다. 희(曦)나라는 안식국(安息國)과 교류를 하지 않아 어떤 나라일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그랬나.”
“네. 그 나라에 대해 자세히 아십니까?”
“관리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바가 있긴 하다만…”
로건의 두 눈이 더 알고자 하는 열망과 호기심으로 물들자 베논은 그에 걸맞은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었다. 수정처럼 투명하고 맑은 눈이 오롯하게 자신을 담는 것에 몸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괜스레 헛기침을 하고 베논이 말을 꺼냈다.
“차를 즐겨 마시나?”
“네. 좋아합니다.”
“…안식국(安息國)의 차를 마셔 보겠나?”
로건은 갈등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던 탓에 쉬이 따라가기엔 자존심이 걸렸다. 그러나 그는 물에 뛰어들어 자신을 구해준 데다 배후가 누구인지 밝히기 위해 다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의 위에 씌워 두었던 악한 인상이 서서히 벗겨지고 있음을 로건도 느끼고 있었다. 거기까진 납득이 갔지만, 왜 자꾸만 그의 곁에 더 머물고 싶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싫다면 거절해도 좋,”
“마시고 싶습니다.”
로건의 대답이 늦어지자 거절할 것이라 생각한 베논의 말을 급히 로건이 잘랐다. 급히 튀어나간 본심에 로건이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베논이 놀란 듯 로건을 응시하다 작게 웃었다. 그를 마주한 로건의 입꼬리도 희미하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자 베논이 길을 앞장섰다. 그 뒤를 로건이 따르자 돌연 베논은 우뚝 서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덩달아 걸음을 멈춘 로건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베논은 다시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아직 나란히 걸을 정도까진 아닌가. 베논의 속도 모른 채 로건은 그와 일정하게 거리를 유지했다.
베논이 거처하는 곳은 도서관과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베논이 걸어오는 길에 마주한 궁녀에게 차를 마실 수 있도록 준비하라 일러 뒀기에 차기구는 금방 준비되었다. 찻잔 안에는 굵직하고 투명한 결정이 붙은 나무 꼬챙이가 들어 있었다. 베논은 서랍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내 열어 로건의 찻잔에 붉은 색의 가닥을 두어 개 넣어 주었다.
“번홍화(番紅花)라는 꽃의 암술이다.”
“이 막대기는 무엇에 쓰는 것입니까?”
“차를 우려낸 후 그것으로 저어 마시면 된다.”
로건이 그의 말에 따랐다. 뜨거운 물을 부어 투명한 물이 색을 머금을 때까지 기다린 후 막대기로 차를 조심스레 휘저었다. 알갱이가 물에 녹아 흩어지자 로건이 찻잔을 들어 조심스레 향과 맛을 음미했다.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일품이었다. 로건이 만족스러워 저도 모르게 얼굴에 잔잔히 웃음을 띄웠다. 금빛 속눈썹 아래의 하늘빛 눈동자와 가느다란 얼굴선, 따뜻한 차 덕분에 발갛게 상기된 볼은 아름답다는 탄사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향이 좋군요. 보리차와 꽤 비슷한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가.”
평소보다 귀가 붉어진 베논이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베논은 말수가 적었기에 대화의 주도권은 자연스레 로건이 쥐게 되었다. 책에서 보았던 안식국(安息國)의 이야기, 좋아하는 문장가와 명필가. 권력을 지닌 자로써 백성들에게 지녀야 할 태도. 이야깃거리가 쌓여 갈수록 밤이 깊어 갔다. 로건은 대화를 나누며 그와 뜻이 꽤나 잘 맞는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권력이라는 특권을 가진 만큼 의무가 따르며, 낮은 곳을 두루 살피는 것은 지배계층의 숙명이니 굳이 필요 없는 전쟁을 일으켜 백성들을 괴롭히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그의 말을 들었을 땐, 옐킨이 아닌 베논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면 지금쯤 자신은 본국에 있지 않을까, 의미 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밖에서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 울릴 때쯤 화제는 검술로 넘어갔다.
“검을 다룰 줄 아나?”
“배우고 싶었지만 기회가 닿질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럴 시간에 학문에 힘을 쏟으라 하시며 제 옆에 무인(武人)을 붙이지 않으셨기에…”
“…그렇다면 나에게 배워 보겠나?”
“…좋습니다.”
로건이 옅게 웃으며 마지막 잔을 비웠다. 달그락. 찻잔이 받침과 마찰하는 소리가 작게 울리고 잠시 고요가 찾아왔다. 차를 대접해 주어 감사하다 인사를 건네고 로건이 처소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밤늦은 시각이니 배웅해 주겠다며 베논은 로건과 같이 몸을 일으켰다. 로건은 그를 만류하려 했지만 목숨이 위험했던 저번 일을 생각해서라도 동행하게 해달라는 베논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자박거리는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밤의 정적을 흩뜨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로건의 의문은 더해 갔다. 베논이 자신에게 과한 배려를 베풀고 있음은 로건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전엔 그에게서 아무런 것도 읽어낼 수 없었는데, 지금은 그의 행동과 눈짓 하나에서 조심스러움이 묻어나는 것이 보였다. 일말의 호감에서 비롯된 것일까? 어쩌면 단순한 연민일지도.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로건이 베논에게 물었다.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제게 잘해 주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네가…”
“……”
“…아니다.”
베논은 말을 흐리더니 대답하지 않고 유려한 금빛 머리칼로 덮인 머리를 따뜻하게 쓰다듬었다. 예상치 못한 손길에 로건이 숨을 멈췄다. 손이 거둬지고 나서야 멎었던 숨을 다시 거둬들일 수 있었다. 내일 정오에 다시 오지. 편한 복장을 입고 기다리도록. 작별 인사를 남기고 베논은 뒤돌아 사라졌다. 로건은 한참동안 그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둠이 한껏 열 오른 얼굴을 감춰주어 다행이라 여기며. 베논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모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