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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논은 검을 잘 다뤘다. 검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는 로건도 느낄 수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자세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강약이 분명했다. 로건은 검을 쥐는 방법부터 차근차근 배워 나갔다. 베논의 가르침을 로건은 빠르게 흡수했다. 둘이 만나는 시간은 날이 거듭될수록 조금씩 늘어갔다. 날이 좋은 날엔 검술을 익혔고 비가 오는 날엔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로건은 그를 향해 세워 두었던 벽이 점차 허물어짐을 느꼈다. 막아보려고 해도 둑이 터진 것처럼 밀려들어오는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도서관에서 시시때때로 맞붙는 시선이 그 사실을 입증했다. 책을 읽다가도 고개를 들면 꼭 약속한 것처럼 시선이 얽혔다. 점점 잦아드는 눈맞춤에 로건은 오묘함을 느꼈다.

 

채송화는 어느 새 꽃잎을 떨궜고 더운 공기는 힘을 잃기 시작했다. 가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표시였다. 로건은 검술을 수련하러 가던 도중 어느 새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국화꽃들을 눈에 담았다. 북쪽의 가을꽃이 피기 시작했으니 남쪽에 있는 희()나라에서는 이미 꽃이 만발해 있을 터였다. 그리운 마음이 다시금 사무친 로건이 쓴웃음을 짓자 곁에 있던 베논이 그의 표정을 살폈다.

 

 “어디 불편한가?”

 “국화꽃을 보니 제 나라가 그립습니다. 지금쯤 대궐엔 국화꽃으로 가득 차 있겠지요.”

 “……”

 “……”

 “국화차를 준비하라 이르겠다.”

 “……네.”

 “차를 마시면서 서신에 쓸 내용도 생각해 보지.”

 

서신이라는 단어가 베논의 입에서 나오자 로건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나라와 희()나라는 교류를 하지 않는 탓에 로건은 고국에 제 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 내관이나 궁녀들을 시켜 국경을 넘도록 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희()나라의 소식을 듣는 방법은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전해 듣는 것 뿐이었다. 로건이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밖으로 토해낼까 두려워 손으로 입을 막았다.

 

 “승려들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들었다. 내 그들에게 서신을 전해 달라 부탁해 보겠다.”

 

로건이 고개를 조심스레 끄덕였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가족들의 안부, 몸 담던 대궐의 풍경. 편지에 담을 내용을 머릿속으로 더듬던 로건의 앞에 혼례를 치를 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여동생의 얼굴이 스쳤다. 항상 호기심과 장난기가 넘치던 눈이 혼례일에 물기를 머금었을 때를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나의 안부도 전해야겠지. 나는… 황자가 배려해준 덕에 나름 잘 지내고 있다 써야 할까.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나, 동생아.”

 

뒤에서 들려오는 차분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로건의 표정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베논이 허리를 반쯤 숙이자 로건도 별 수 없이 몸을 돌렸다. 등 뒤에 수하들을 거느리고 인자한 척을 하며 거만히 둘을 내려다보는 유(柳)나라 황제에게 로건도 허리를 굽혀 거짓 예를 표했다. 등 뒤에 숨긴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그간 잘 지냈소? 희()나라의 왕세자.”

 “왕세자가 아닌 황태자입니다. 희()나라가 부마국이 되었다 한들 속국이 아닌 어엿한 제국입니다.”

 “사정이 같은 건 매한가지 아닌가.”

 

아픈 곳을 사정없이 찔러오는 비수 같은 말에 로건이 이를 악물었다. 그동안 궁에서 옐킨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로건을 무시로 일관했고 로건은 분했지만 제 처지를 생각하며 모욕을 참지 않는 성격을 죽여 왔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속을 긁는 말을 던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로건이 미간을 좁히자 옐킨이 다시 말을 이었다.

 

 “희()나라로 서신을 보내는 건 내가 윤허하지 않겠다.”

 “어째서…!”

 “그대가 유()나라 황궁의 비밀을 누설할지 어찌 알겠는가?”

 “그런 황태자가 같은 황궁 안에서 그대에게 찾아와 언제든 목을 벨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 보군요?”

 

로건이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허리의 칼을 뽑아 들자 옐킨의 호위대들이 일제히 칼을 빼어 로건에게 겨눴다. 옐킨은 명백한 조롱을 띈 미소를 머금고 그를 바라보았다. 로건의 독기 어린 눈이 모욕을 준 상대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매섭게 빛났다.

 

 “백성들을 위해 이곳으로 왔다 들었는데, 적어도 내 비위 정도는 맞춰야 하지 않겠나? 내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희()나라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터인데.”

 “경솔한 언행을 삼가십시오!”

 “그렇다면 그대도 경솔한 행동을 삼가도록.”

 “저를 먼저 모욕하셨잖습니까.”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

 “그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

 “방에 들어가 지금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도록.”

 

울화에 속이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옐킨이 손짓하자 호위무사들이 검을 칼집에 넣고 옐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만 가지. 옐킨이 일행들을 거느리고 유유히 사라지자 로건은 마음 속 깊이 묻어 두었던 열등감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고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베논이 그런 그를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베논은 역시 그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조금이라도 더 웃었으면 좋겠단 바람은 위선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진정 그가 행복하길 바란다면 제 곁에서 놓아주는 것이 맞을 것이다. 로건과 함께 훈련장으로 걸음을 옮기며 그는 생각을 굳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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