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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베논은 옐킨을 보자 청했다. 형님과 처음으로 담판을 지을 생각에 두려움이 조금 앞섰다. 로건을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라며 스스로를 다잡던 베논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어떤 일이든 형님의 말에 복종하며 그 뜻을 따랐던  베논을 변모시킨 것은 로건이었다. 베논은 마음 한 켠에서 정체 모를 감정이 움트기 시작할 때 당당하고 소신을 따르는 로건의 모습은 감정의 크기를 키워 밖으로 꺼내도록 해 주었다. 베논이 문 앞에 다다르자 문이 열렸고, 황금 용이 휘감은 의자에 앉아 있던 옐킨이 동생을 맞이했다. 자애로운 미소를 희미하게 띄운 그는 동생에게 자신을 보고자 한 이유를 물었다.

 

 “일전에 청을 들어주겠다 하셨던 약조를 기억하십니까?”

 

 “기억 하다마다. 원하는 것이 생긴 것이냐?”

 

 “…로건을 희()나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베논이 제 형님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는 현존하는 국가들 중 최정상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음과 동시에, 한 나라의 황제로서의 위신도 챙기는 인물이었다. 로건을 아무 대가 없이 보내주는 것은 손아귀에 넣었던 전리품이자 희()나라의 주요 인물을 잃어버리는 셈이 되고, 동생과의 약조를 저버리면 그의 위신에 금이 갈 것이다. 베논으로선 일종의 도박이었다. 옐킨의 얼굴에는 여전히 자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뒤틀려 있었다. 옐킨이 천천히 숨을 들이쉬더니 살기가 서린 눈으로 베논을 응시했다.

 

 “네가 나를 시험하려 드는구나.”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아뢰었을 뿐입니다.”

 

그의 얼굴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자신을 좆는 회색 눈동자에 베논은 몸이 죄이는 것만 같았다. 팔짱을 끼고 동생을 지그시 바라보던 유()나라의 황제는 이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얼굴에 웃음기를 되찾았다. 의자를 가까이 당겨와 앉은 옐킨이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고 동생의 얼굴을 하나하나 조각낼 듯 살피다 말을 이었다.

 

“청을 들어주는 대신 나와 거래를 하자꾸나. 희()나라의 황태자가 내게 얼마나 큰 의미인진 너도 잘 알고 있겠지.”

 

베논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엘킨은 문 앞에서 얼어붙은 공기에 눈치를 살피고 있던 내관을 불러 지도를 가져오라 일렀다. 베논은 옐킨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직감했다. 곧 국가들의 이름이 쓰인 커다란 지도가 황제의 책상 위를 덮었다. 그간 많은 땅덩어리를 집어삼킨 탓에 경계선을 공유하는 나라들도 이전보다 훨씬 많아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옐킨의 손가락이 유()나라의 국경선을 따라 움직이다 한 군데에서 멈췄다. 옐킨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변방 국가와 땅을 맞대고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국경선 너머 다른 나라의 평야뿐만 아니라 샛길 하나까지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고원 지대를 차지하려 지금까지도 그들은 크고 작은 싸움을 지속적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황태자를 보내주는 대신, 이곳을 지켜라. 요즘 들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베논이 옐킨과 대비되는 검은색 눈동자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옐킨이 불러주지 않는 이상 다시 궁으로 돌아오긴 힘들 것이다. 전투에서 진다면 죽을 수도 있겠지. 대답을 기다리는 차가운 옐킨의 시선을 오롯이 받아낸 베논은 두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운 침묵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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