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로건의 귀에 들어간 첫 번째 소식은 이만 본국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전갈이었다. 황제께서 직접 명했다는 내관의 말에 로건은 어안이 벙벙했다.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라는 어제의 말과는 정반대의 전갈에 그가 자신을 희롱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가급적이면 최대한 빨리 떠나라고 하십니다. 이어진 내관의 말에 우선 떠날 채비를 도와 달라는 말을 남긴 후 로건은 문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정원 한 가운데 서있는 베논이 보였다. 그는 며칠 전 지운 꽃으로 씨앗을 터뜨릴 준비가 한창인 채송화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로건이 다급히 베논에게 다가가자 발소리를 알아채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간밤에 잠을 설친 듯 평소보다 눈가가 더 짙어져 있었다. 로건이 말을 꺼내기 전에 베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떠나는 것인가.”
“알고… 계셨습니까?”
“……”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 대신 베논은 채송화 꽃이 진 자리에 맺힌 주머니를 열어 까맣게 익은 씨앗들을 손바닥에 쏟았다. 손바닥의 검은 알갱이들을 소중하다는 듯 눈에 담더니 조심스레 종이에 싸 소매에 넣었다.
본국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기꺼웠다. 그러나 로건은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기쁨에 의아함과 서운함이 달라붙어 감정을 희석시키고 있었다. 왜 옐킨이 갑자기 태세를 바꿔 본국으로 돌아가라 했는지 의아함이 들었고, 자신이 떠나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말없이 수선화에만 시선을 고정한 베논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의아함과 서운함은 기쁨에 엉겨 떠오르려 하는 긍정적인 감정을 서서히 가라앉히고 있었다.
궁에서 베논과 나눴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길다고 할 수 없지만 짧지만은 않았던 시간들. 표현을 과하게 하지 않아도 로건은 그가 항상 자신을 배려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독한 타국 생활에 저도 모르게 곁은 많이 내준 것인지, 그와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마음 한 켠이 비어 버린 것만 같았다. 로건은 용기를 내어 베논에게 제안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나는 변방으로 간다.”
“예?”
“희(曦)나라로 돌아가게 해주는 대신 나더러 전략적 요충지를 지키라 명하셨다.”
생각치도 못한 말에 로건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베논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설명하자 의아함이 풀렸고 로건은 무모한 결정을 내린 베논에게 역정을 내고 싶었다. 변방에 가게 된다면 언제 궁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 기약도 없을 터인데. 걱정과 화가 뒤섞여 로건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만나야만 합니다.”
그를 어르듯 베논이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로건은 그의 말이 헛되지 않도록 강하게 힘을 실었다. 두 시선이 진득하게 얽혔다. 베논은 지금이 아니면 영영 제 마음을 보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로건에게 제 감정을 내비쳤다.
“…연모한다.”
갑작스러운 베논의 고백에 로건의 눈이 깊게 일렁였다. 진실된 마음을 전할 땐 미사여구가 붙은 화려하고 달콤한 말들보단 담백한 한 마디가 더 효과가 있는 법이다. 연모한다. 그 한 단어가 깊은 연못에 빠진 돌처럼 로건의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만들고 깊이 가라앉았다. 파문은 일렁거리며 손가락 끝까지 아리게 만들었다. 로건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주하기 두려워 감춰 자물쇠를 걸어 두었던 마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눈물도 함께 비집고 나와 시야가 점차 흐려졌다. 로건은 눈가를 어루만져주는 눈 앞의 그가 애틋하게 정다워 보였다. 순간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당긴 뒤 짧게 입술을 부딪히고 떨어졌다.
“저 또한, 연모합니다.”
“……”
로건이 베논과 눈을 맞추며 속 깊이 감춰 두었던 감정을 꺼냈다.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고 머리를 넘겨주는 베논의 손길은 퍽 다정했다. 로건은 모르는 척 다시 살포시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차양을 내려 로건의 눈동자를 가리자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베논은 그에게 입술을 포갰다. 재회할 날이 기약되지 않았기에 떨어진 입술은 아쉬움에 다시 맞붙기를 반복했다.